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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잔해가 끝없이 펼쳐진 도시를 가로질렀다. 무너진 고층 빌딩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거친 바람이 일으킨 먼지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낡은 고글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흙먼지에 절어 딱딱하게 굳은 전투복은 이미 오래전에 제 색깔을 잃었다. 나는 익숙하게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어디선가 작은 식량 조각이라도, 아니면 쓸만한 도구라도 찾아야 했다. 버텨야 했다. 그냥 버텨. 내 안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목소리는 이제 내 존재의 이유가 되었다.

폐허가 된 서울은 더 이상 사람이 살던 곳이 아니었다. D+365일. 외계종 침공 이후 1년이 흘렀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더 깊은 절망만이 나를 옥죄어왔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어제와 똑같은 잿빛 하늘과 무너진 건물들이 나를 반겼다. 살아남는다는 건, 고통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가족을 잃던 그 날의 비명과 뜨거운 피, 그리고 무력했던 내 모습이 여전히 생생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지 않겠다고.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선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해야 한다고. 내가 강해져야만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너진 지하철역 입구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녹슨 철골 구조물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고,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전등 빛이 닿는 곳마다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며 발소리를 죽였다. 외계종의 정찰체들은 소리에 민감했다. 놈들의 불쾌한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아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공포가 나를 지배했다.

한참을 헤매다 낡은 통신 장비 파편과 함께 먼지 쌓인 비상 식량 캔 몇 개를 찾아냈다. 녹이 슬어 있었지만, 내용물은 괜찮아 보였다. 이 정도면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동시에 허탈함도 찾아왔다. 겨우 이 정도에 안도하는 내 모습이 비참했다. 하지만 생존자에게 사치는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비참함조차도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복도를 발견했다. 다른 곳보다 훨씬 견고해 보이는 철문이 시선을 끌었다. 낡은 문에는 희미하게 '군사 시설 통제 구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발견했던 곳들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분명 뭔가 중요한 곳이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식량보다 더 귀한 것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호기심과 함께 경계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런 곳에 외계종이 드나들지 않았을 리 없었다. 나는 무장을 단단히 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쇠지렛대로 틈을 벌려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역시 군사 시설답게 단단했다. 하지만 굴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 굶주릴 것이다. 나는 주변을 살피다 폭발물 잔해를 발견했다. 아마도 침공 당시 파괴된 건물에서 날아온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잔해를 모아 문에 설치했다. 작게 폭발시키면 잠금장치 정도는 부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이런 것까지 능숙해졌군.' 스스로에게 쓴웃음을 지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 해야 했다.

조작된 폭발물이 터지자 굉음이 지하 시설을 뒤흔들었다. 예상보다 큰 소리에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낡은 철문은 겨우 잠금장치만 부서진 채 기우뚱거렸다. 문을 밀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길게 이어진 어둡고 습한 통로가 나를 맞이했다. 공기는 바깥보다 훨씬 차가웠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묘한 금속 냄새가 섞여 있었다.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한 걸음씩 내디뎠다. 벽에는 오래된 배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천장에서는 녹물이 스며 나와 길게 흘러내렸다.

통로는 마치 미로 같았다. 여러 갈래로 나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지도도 없이 이런 곳을 헤매는 건 위험했지만,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뭔가에 홀린 듯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이 곳 어딘가에 내가 찾던 것이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저 허황된 희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폐허 속에서 살아가는 내게 그런 희망은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의 또 다른 원동력이었다.

마침내 통로의 끝에 다다랐다. 거대한 철제 문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까지 본 어떤 문보다도 압도적인 크기였다. 문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마치 거대한 존재가 잠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한 손으로 권총을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삐걱거리는 굉음과 함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온몸을 감쌌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거대한 공간이 드러났다. 낡은 격납고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기계 병기가 서 있었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내 키의 수십 배는 족히 될 거대한 강철 거인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손전등 불빛이 거인의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 녹슬고 먼지 쌓인 강철은 죽은 듯 침묵했지만, 그 존재감은 살아있는 어떤 것보다도 강렬했다. 마치 오래된 신화 속 거인이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것이 존재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외계종의 침공 이후 인류의 모든 기술은 무용지물이 된 줄 알았다. 하지만 내 눈앞에 선 저 거대한 기계는 달랐다. 분명 인류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지금껏 내가 알던 모든 것을 초월한 듯 보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공포와 경외심이 뒤섞인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거인의 왼쪽 어깨 부분에 희미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먼지를 닦아내자 '프로토타입 제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0번기. 시제기라는 뜻인가? 왜 이런 곳에 숨겨져 있었을까. 그리고 왜 지금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을까.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모든 의문보다도 강렬하게 나를 이끄는 것은, 저 거대한 존재에 대한 막연한 끌림이었다.

나는 마치 홀린 듯 0번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텅 빈 격납고에 울려 퍼졌다. 찰칵, 찰칵. 내 심장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0번기의 압도적인 크기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매끄럽지만 견고해 보이는 외장, 복잡하게 연결된 관절 부위들, 그리고 마치 눈동자처럼 보이는 머리 부분의 렌즈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저것이 움직인다면, 분명 세상을 뒤흔들 힘을 가졌을 터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 표면이 손끝에 닿았다. 녹이 슬어 거칠었지만, 그 아래에는 단단하고 매끈한 강철이 느껴졌다. 순간,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단순한 정전기가 아니었다. 강렬한 에너지 파동이 내 신경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고통과 전율이 뒤섞인 감각 속에서 0번기의 눈동자처럼 보이는 부분이 푸른빛으로 섬광했다.

"크아악!"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이미지와 정보들이 폭풍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거대한 기계음, 알 수 없는 언어들, 그리고 푸른빛의 섬광들이 나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몸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0번기의 시스템이 요동치고, 굉음이 지하 시설 전체를 뒤흔들었다. 격납고의 낡은 조명들이 깜빡거렸다.

푸른 섬광은 더욱 강렬해졌다. 0번기의 몸체 곳곳에서 작은 전류가 흐르는 듯한 빛이 번쩍였다. 마치 잠들어 있던 거인이 깨어나는 것처럼, 거대한 에너지가 격납고를 가득 채웠다. 내 정신은 미지의 정보들로 과부하되었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묘한 전율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이 거대한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0번기의 표면을 움켜쥐었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그 안에서 어떤 질서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혼돈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그림이 그려지는 듯했다. 0번기가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거대한 힘, 알 수 없는 미래,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내가 변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 거대한 기계와 나는 특별한 연결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부터 내가 정한다.

푸른 섬광을 내뿜으며 각성하는 0번기와 정신을 부여잡는 내 모습. 그때였다. 지하 통로 너머에서 정체불명의 외계종의 진동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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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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