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성(泗沘城)이 불타던 그날 밤의 기억은, 죽음이 다가올 때조차 생생했다. 아니, 생생하다는 말은 부족했다. 그것은 살갗에 각인된 것이었다. 화염이 솟구치는 냄새, 무너지는 목조 기둥의 굉음, 군사들의 아우성이 사비성 전체를 뒤덮던 그 순간 . 열일곱 살의 부여 민준은 성벽 끝에 서 있었다. 두 발 아래의 돌바닥이 진동하고 있었고, 저편에서는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을 찌르며 치솟았다. 군사들의 절규와 불 타는 나무의 굉음이 뒤엉킨 사비성의 마지막 밤이었다.
검흔(劍痕)이 깊었다.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고, 쓰러지는 몸을 지탱하려 짚은 손바닥 아래 차가운 돌바닥의 감촉이 오히려 선명했다. 저편에서 흑련회(黑蓮會) 검객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들렸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 아니, 이미 끝난 싸움의 잔향이었다.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가슴 안쪽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 숨인지 피인지 알 수 없었다. 민준은 눈을 감지 않으려 했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아직 다섯 살도 채 안 된 민서의 웃음소리가. 청색 도복을 입은 채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낸 적 없던 아버지의 무뚝뚝한 뒷모습이. 그 모든 것이 눈을 감으면 이대로 영영 사라질 것 같았다.
"어...머니."
말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혀가 무거웠고, 가슴 안쪽이 조여드는 감각이 숨통을 막았다. 사비성 너머 저 멀리서 함성이 울렸다 . 승전의 함성인지 패배의 절규인지, 이미 그것을 분별할 여력이 없었다. 민준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고, 돌바닥의 차가움이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이 내리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열렸다. 처음에는 빛이었다. 푸른 빛이었다. 눈을 감은 것도, 뜬 것도 아닌 어떤 경계에서 그 빛은 솟아올랐다. 아니, 솟아오른다는 말도 정확하지 않았다 . 그것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으나 민준이 지금에야 비로소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조용하고 무겁고 압도적으로 펼쳐졌다.
송산리(宋山里) 육호분(六號墳). 사신도(四神圖). 민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몇 번인가 다녀온 적이 있는 그 고분의, 북쪽 벽면에 새겨진 청룡(靑龍)의 벽화였다. 어린 민준의 눈에는 그저 낡고 거친 돌 위에 그려진 그림에 불과했던 것이 . 지금 이 죽음의 경계에서는 전혀 다른 것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것이 살아 있었다. 그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비늘이 숨 쉬었다. 청록(靑綠)과 남색(藍色)이 섞인 비늘 하나하나가 미세하게 떨리며 빛을 품고 있었고, 구름무늬(雲紋)가 소용돌이치며 장대한 몸체를 감아 돌았다. 길게 뻗은 앞발의 발톱 끝에서 가느다란 섬광이 튀었고, 용의 눈동자 . 금빛과 청색이 뒤섞인, 어떤 인간의 눈에서도 볼 수 없는 깊이를 지닌 그 눈동자가 민준을 내려다보았다.
말은 없었다. 그러나 뜻은 있었다. 민준은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단전(丹田)이, 가슴이, 온 살갗이 그 울림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단 네 글자가 아닌, 무언의 파동이 그 의미를 민준의 혼(魂) 안쪽에 새겨 넣었다. 부여 가문의 핏줄에 깃든 무언가가 그 울림에 응답하며 떨렸다. 아직 그 의미를 다 헤아리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계약(契約)임을 민준은 알았다. 살갗 아래에서 무언가가 단단하게 묶이는 감각이었다.
빛이 쏟아졌다. 청룡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린 빛이 민준의 온몸을 감싸는 순간, 돌바닥의 감촉이 사라졌다. 선혈의 온기가 사라졌다. 사비성의 함성이 사라졌다. 죽어가는 열일곱 살의 몸이 . 그 무게가, 그 고통이 . 점점 멀어졌다. 민준은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할 수도 없었지만, 저항하고 싶지도 않았다.
민준은 빛 속으로 끌려 내려갔다. 꿈인지, 기억인지.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아닌 무언가인지. 민준은 알지 못한 채 떨어지고, 떨어지고, 끝없이 떨어졌다. 첫 번째로 돌아온 감각은 빛이었다. 창호지(窓戶紙)를 뚫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었다. 차갑고 선명하게 의식을 깨우는 그 빛이 눈꺼풀 너머로 스며들자, 민준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소나무 마루였다. 손바닥 아래 결이 선명한 소나무 목재의 감촉, 그 위에 내려앉은 햇빛의 따스함 . 돌바닥의 차가움이 아니었다. 선혈의 뜨거움이 아니었다.
살아 있다. 그 생각이 도달하기도 전에 민준은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방 안이 빙글 도는 것 같은 감각에 한 손으로 마루를 짚으며 숨을 골랐다. 좁고 낮은 방이었다. 벽에는 서툰 솜씨로 그려진 사신도 습작(習作) 넉 장이 걸려 있었고, 구석 책상 위엔 먹과 붓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창호지 너머로 마당의 바람 소리가 들렸다. 봄바람이었다.
민준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작았다. 열일곱 살의 손이 아니었다. 거칠고 굳은살이 박힌 무인의 손이 아니라, 아직 검을 제대로 쥐어보지 않은 어린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가 가늘었고, 손바닥은 부드러웠다. 검흔 하나 없는, 상처 하나 없는 손이었다. 민준은 그 손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현실이었다. 사비성 함락이 있기 4년 전 . 그 어떤 것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때였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는 때. 민서가 아직 다섯 살 아이인 때. 아버지가 아직 청색 도복을 입고 마당을 가로질러 다니는 때. 4년이라는 시간이 . 그 4년이 통째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민준아. 아침 먹어야지!"
창호지 너머로 소리가 들렸다. 민준의 온몸이 굳었다.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언제였던가. 사비성 함락 전날 밤, 어머니는 밥상을 차려 민준 앞에 놓으며 그렇게 불렀다 .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로 그 목소리는 민준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아 있었는데, 지금 그 소리가 살아있는 채로 창호지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따스하고, 흔들림 없고, 그저 아들이 늦잠을 잤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였다.
"오빠! 오빠 일어났어요?"
민서였다. 맑고 여린 그 목소리 . 민준은 주먹을 쥐었다. 손끝이 떨렸다.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찌 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입술이 굳게 다물어지고,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꽉 찼다. 일어서야 한다. 민준은 마루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안채 마당으로 나서자 아침 햇살이 기와 너머로 넘어오고 있었다. 부여 본가(扶餘本家)의 마당은 넓지 않았다. 기와를 얹은 낮은 행랑채가 동서로 늘어섰고, 그 가운데 흙마당에는 오래된 우물과 장독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당 한 귀퉁이 느티나무가 아직 어린 잎을 내밀고 있었다. 봄이었다 . 민준은 그것을 새삼스럽게 알았다. 사비성이 불타던 그날 밤은 한겨울이었는데, 돌아온 이 아침은 봄이었다. 흙담 사이로 스며드는 봄바람이 마당의 먼지를 나직이 일으켰고, 장독대 사이 어딘가에서 참새 한 마리가 짧게 울었다.
동쪽 처마 밑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 청색 한복 자락을 여민 채 약초 단(藥草束)을 손질하던 어머니가, 마당으로 나서는 민준을 보며 눈을 들었다. 온화하고 너른 눈빛이었다. 사비성 함락의 기억 속에서 그 눈빛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는데, 지금의 어머니는 그저 아들이 늦잠을 잤다는 듯 빙그레 웃고 있었다. 처마 밑 아침 그늘 속에서, 약초 향이 가볍게 풍기는 가운데, 그 얼굴이 봄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겨우 일어났구나. 아침상 차려 놨다."
"...어머니."
민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민준은 눈을 들어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봄 햇살 아래 드러난 어머니의 얼굴 . 주름 하나, 눈가의 온기 하나 . 지금 이 순간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었다. 민준의 입술이 떨렸다.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참았다. 지금은 눈물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왜? 어디 불편하니?"
"아닙니다."
"오빠!"
짧게 답하고 입술을 깨무는 순간이었다. 서쪽 행랑채 쪽에서 작은 발소리가 달려왔다. 민서였다. 긴 흑발을 두 갈래로 묶은 채 청색 한복을 입은 소녀가 통통한 발로 흙마당을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었다. 다섯 살 . 아직 그저 어린아이였다. 죽음의 순간 민준이 마지막으로 불렀던 이름의 주인이, 지금 이렇게 살아서 달려오고 있었다. 발끝이 마당의 흙을 채며 바람처럼, 그리고 해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오빠, 일어났어요? 저 혼자 밥 먹고 있었는데!"
민서가 민준의 도복 자락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들었다. 맑고 둥근 눈동자가 오빠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눈가에 맺힌 무언가를 알아챈 듯 작은 이마를 찌푸렸다.
"오빠, 눈이 빨개요."
"...찬 바람이 들어왔나 보다."
"거짓말이에요. 안에 있었잖아요."
민서의 논리정연한 지적에 민준은 그만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어린 동생의 그 당돌함이,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어떤 무공의 일격보다 단단하게 가슴 안쪽을 쳤다. 민준은 민서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아직 자신의 손이 작은 탓에 동생의 머리를 쓸기에 불편할 정도였지만, 그것이 또한 현실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의, 되돌아온 봄날 아침의 현실이었다.
살아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버지는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민준이 마당에 나선 직후였다. 부여 가문주(扶餘家門主) . 45세의 무인은 청색 도복을 단정히 여미고, 허리에 직검(直劍)을 차고, 어깨를 곧게 편 채 걸었다. 걸음에 흐트러짐이 없었고,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미 수련을 마친 것인지, 걸음 아래 흙먼지가 가볍게 일었다. 민준의 눈에는 그 걸음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 회귀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은 흑련회의 검객들을 상대하며 비틀리고 있었는데, 지금의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아침 마당을 걷고 있었다.
그 순간, 아버지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민준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엄격한 눈빛 아래 무언가가 훑고 지나갔다.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 그 잠시가 민준에게는 유독 길게 느껴졌다 . 조용히 고개를 돌려 걸음을 이었다.
말은 없었다. 그러나 민준은 알았다. 아버지가 무언가를 감지했다는 것을. 45세의 무인이 지닌 직감은 그러한 것이었다 . 아들의 눈빛이 어제와 달라졌음을, 그 작은 열세 살의 눈 안에 전과 다른 무게가 담겨 있음을. 가문주는 그것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지나쳤다. 사랑채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렸고, 마당에는 다시 봄바람과 느티나무 잎의 사각거림만 남았다.
그 침묵이 마당 한복판에 무겁게 남았다. 민준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멈추어 있었다. 어머니는 처마 밑에서 약초를 손질하는 일로 돌아갔고, 민서는 민준의 도복 자락을 잡은 채 무언가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 모든 풍경이 봄 햇살 아래 따스하고 평화로웠다. 민준은 그 풍경을 눈 안에 담았다. 이것이었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 청룡이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돌아온 것이었다. 아버지의 침묵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지금 당장은 다 알지 못하더라도 . 지켜야 할 것들이 여기 있었다.
오후가 기울어 저녁 빛이 마당에 드리울 무렵, 민준은 뒤뜰로 나섰다. 뒤뜰은 수련(修鍊)을 위한 공간이었다. 별다른 꾸밈 없이 평평하게 고른 흙바닥이 펼쳐져 있었고, 동쪽 담장 아래 오래된 말뚝 몇 개가 꽂혀 있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한 시각의 뒤뜰은 그림자가 길었다. 담장 너머 솔숲의 울창한 가지들이 저녁바람에 흔들리며 낮고 긴 소리를 냈고, 어디선가 흙 냄새가 섞인 솔향이 담을 넘어 들어왔다.
민준은 흙바닥 위에 섰다. 직검은 방에 두고 나왔다. 열세 살의 몸에 회귀 전 몸의 기억을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 그것을 민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어린 몸이 지닐 수 있는 것과 머릿속 기억이 요구하는 것 사이의 거리를, 차근차근 좁혀 나가야 했다. 그러나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죽음의 경계에서 보았던 그 청룡의 빛이 이 몸 안에 무언가를 남겼는지를.
민준은 눈을 감았다. 솔숲의 바람 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서쪽 처마 끝에서 풍경(風磬)이 가늘게 울렸고, 멀리 사랑채 쪽에서 아버지가 무언가를 움직이는 기척이 들렸다. 봄 흙의 냄새가 발바닥 아래에서 올라왔다. 민준은 그 모든 감각을 흘려보내면서, 안쪽으로 집중을 가져갔다.
단전(丹田). 아랫배 깊은 곳에 자리한 그 자리에 의식을 모으자, 미세한 것이 느껴졌다. 열세 살의 단전은 아직 거의 비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회귀 전 쌓아 왔던 내공(內功)은 이 어린 몸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았다. 단전 가장 깊은 곳, 마치 솔숲 새벽의 이슬방울만큼 작고 맑은 것이 .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 . 살아 있었다. 민준은 그것을 향해 조용히 의식을 내밀었다.
그 순간. 발끝이 떨렸다. 발바닥 . 정확히는 오른발 엄지발가락의 아래쪽 흙바닥과 맞닿는 자리에서, 어떤 미세한 진동이 올라왔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 진동은 굳이 색깔을 붙이자면 푸른 것이었다. 청록의 것이었다. 마치 죽음의 경계에서 보았던 청룡의 비늘 빛이 이 흙바닥 아래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지금 막 처음으로 싹을 틔우는 것 같은 감촉이었다. 발끝에서 정강이로, 정강이에서 무릎으로 . 그 진동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라오려다 이내 사그라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나 민준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눈을 뜨지 않은 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회귀 전 그 4년이 이 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부여 가문의 핏줄에 청룡의 계약이 새겨진 것이 아직 완전히 잠든 것이 아니었다. 아직 이름도 붙이지 못한, 형식도 갖추지 못한 그 감촉이 . 그러나 분명히 거기 있었다.
민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저녁빛이 뒤뜰을 비스듬히 가로지르고 있었고, 흙바닥 위에 자신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있었다. 담장 너머 솔숲에서 새 한 마리가 울었다.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그러나 민준의 가슴 안쪽에는 그 평화와 전혀 다른 온도의 다짐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 그 말이 소리도 없이,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채 민준의 가슴 안쪽에 새겨졌다. 사비성이 불타던 그날 밤을 다시 만들지 않을 것이었다. 어머니가 그 눈빛으로 공포에 일그러지는 것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었다. 민서가 그 작은 손으로 땅을 짚으며 쓰러지는 것을 다시 겪지 않을 것이었다. 아버지가 흑련회의 검에 어깨를 베이며 이를 악무는 것을 다시 바라보지 않을 것이었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그리고 그 시작이 이 발끝의 떨림이었다.
어둠이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봄이라 해도 해가 기울면 저녁 기운이 서늘했다. 담장 위로 저무는 노을이 기와를 붉게 물들이다 사그라졌고, 솔숲의 그림자가 담장을 타고 뒤뜰까지 길게 늘어졌다. 민준은 자리를 옮기지 않은 채 담장을 바라보았다.
이끼가 낀 흙담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군데군데 금이 간 담장 위로 오래된 이끼가 녹색으로 퍼져 있었고, 그 아래 흙의 냄새가 저녁바람에 섞여 왔다. 부여가 본가를 둘러싼 담장은 높지 않았다 . 어른이 손을 뻗으면 위를 짚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담장 너머로는 솔숲과 야트막한 언덕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녁 솔숲은 어둡고 조용했다. 바람이 가지 사이를 지나며 낮은 소리를 냈다.
민준은 담장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온몸의 솜털이 일어서는 감각이 들었다. 명확한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보거나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열세 살의 어린 몸 안에 깃든 열일곱 살의 기억이, 그리고 청룡의 계약으로 처음 깨어난 그 미세한 감각이 . 소리 없이 경보를 울렸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그 경계심(警戒心)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솔숲이었다. 담장 너머 솔숲의 그림자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짐승이 지나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 정확하게, 의도적으로, 숨을 죽이며 움직이는 사람의 기척이었다. 극히 짧았다. 솔숲의 가지 사이로 스치고 사라진 것이 눈에 걸리는 실루엣이었는지, 아니면 그 움직임으로 인해 살짝 흔들린 나뭇가지의 파문이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을 만큼 짧은 것이었다.
그러나 민준의 눈이 좁아졌다. 회귀 전 기억을 뒤졌다. 사비성이 함락되기 전, 흑련회(黑蓮會)가 부여가 주변을 먼저 살핀다는 것을 민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정찰(偵察)이었다. 검객을 보내기 전에 먼저 그림자를 보내 지형과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흑련회의 방식이었다. 가슴에 검은 연꽃 자수 하나를 달고, 소리 없이 움직이며 관찰하는 그들 . 그 그림자가 이미 이 봄날 저녁에 부여가 근처에 와 있는 것이었다.
민준은 발끝을 흙바닥에 고정한 채 담장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솔숲은 다시 조용해졌다. 바람이 지나가고, 새가 울고, 그뿐이었다. 그러나 민준은 이미 알았다. 저 솔숲 안 어딘가에서, 검은 두건을 두른 누군가가 부여가 뒤뜰의 소년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소년이 어제와 다른 눈빛으로 담장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 역시 . 저쪽도 감지했을 것이었다.
"민준아, 저녁상 차렸다."
안채에서 어머니가 민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담장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뒤뜰 흙바닥을 가로질러 안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담장 쪽으로 열린 의식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다. 저녁 밥상 위에 앉아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민서가 재잘거리는 소리를 귓가에 담으면서도 . 가슴 한쪽의 긴장을 내려놓지 않았다. 저쪽은 아직 이쪽을 결정적으로 표적 삼은 것이 아니었다. 정찰의 단계였다. 그러나 그 정찰이 끝나고 확신이 서는 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 민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발끝에서 깨어난 그 청룡의 기운을 다듬어야 했다. 이 열세 살의 몸이 지닐 수 있는 것을 빠르게 늘려야 했다. 혼자서는 안 된다면 도움을 구해야 했고, 담장 너머의 그림자가 가까워지기 전에 무언가를 세워두어야 했다.
밥상 위에 놓인 그릇들이 저녁 등불 아래 흔들렸다. 어머니가 민서에게 무언가 말하며 웃었다. 민서가 오빠 쪽을 쳐다보며 까르르 소리를 냈다. 아버지는 사랑채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그러나 민준의 눈에는 그 평화의 바깥, 이끼 낀 흙담 너머의 솔숲이 보이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고 집 안이 잠잠해진 뒤에도, 민준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등불을 끈 방은 어두웠다. 창호지 너머로 달빛이 가늘게 스며들었고, 천장 목재의 결이 그 빛 안에 희미하게 드러났다. 민준은 소나무 마루 위에 등을 대고 누운 채 눈을 뜨고 있었다. 벽에 걸린 서툰 사신도 습작(習作) . 어린 손으로 그린 청룡과 백호와 주작과 현무 . 이 달빛 속에 흐릿한 윤곽으로 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다가 민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죽음의 경계에서 본 청룡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금빛과 청색이 뒤섞인, 어떤 인간의 눈에서도 본 적 없는 그 깊이를. '다시 한 번'이라는 말 없는 울림이 단전에 새겨진 감촉을. 그리고 열일곱 살의 몸에서 열세 살의 몸으로 끌려 내려오는 그 감각 . 아직도 손바닥 안에 그 기억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회귀(回歸). 그것은 선물이기도 했고, 무게이기도 했다. 어머니와 민서가 살아 있다는 것은 선물이었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직 곧다는 것. 부여가 본가의 담장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그것이 언제까지 선물로 남아 있을 것인가는, 온전히 민준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저 담장 너머 솔숲에 이미 그림자가 와 있었다. 그 그림자가 확신을 가지고 돌아오기 전에, 민준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발끝에서 깨어난 그 미세한 청룡의 기운을 다듬고, 이 어린 몸이 지닐 수 있는 것을 빠르게 늘리고, 혼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알아내야 했다.
창호지 너머 달빛이 조금 더 밝아진 것 같았다. 솔숲의 바람 소리가 밤기운을 타고 낮게 들렸다. 집 안은 고요했다. 민준은 눈을 감으면서 오늘 저녁 담장 너머에서 스친 그 기척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되새겼다. 빠른 것이었다. 조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라지기 직전의 그 찰나에, 솔숲 그림자 사이로 스친 실루엣이 명백히 사람의 형태였다.
이끼 낀 흙담 너머 솔숲에서 . 검은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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