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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창호지를 얇게 물들이는 새벽, 민준은 눈을 뜨기 전부터 이미 깨어 있었다. 잠을 이룬 것인지 이루지 못한 것인지 그 경계가 모호했다. 17세의 기억으로 13세의 몸을 누르고 있는 것이 늘 그러했다. 눈꺼풀 뒤에는 어젯밤 담장 너머에서 스쳤던 그 기척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솔숲 그림자 사이로 소리 없이 사라지던 검은 실루엣의 잔상이 의식의 가장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17세의 기억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흑련회(黑蓮會)의 정찰꾼은 반드시 돌아온다. 무언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민준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소나무 마루의 결이 새벽 냉기를 머금은 채 발바닥을 눌렀다. 창호지 너머로 스미는 달빛은 흰 종이를 불빛에 비추어 놓은 것처럼 연하고 침잠하여, 방 안의 모든 것을 윤곽만으로 남겨 두고 있었다. 벽에 걸린 서툰 사신도(四神圖) 습작이 흐릿한 그림자가 되어 있었고, 구석 책상 위 먹과 붓은 어둠 속에서도 가지런했다. 이 어린 몸이 무언가를 감당하려면, 먼저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어젯밤 발끝에서 깨어났던 그 미세한 청룡의 기운.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민준은 알고 있었다. 17세의 기억 속에서도, 회귀 직전 의식이 허물어지던 그 마지막 순간에도, 눈동자 가득 차오르던 것은 청록빛의 거대한 무언가였다. 사비성(泗沘城) 동쪽 솔숲을 타고 뿌리 내린 송산리(松山里) 사당의 그것. 13세의 몸 안에서 이미 대답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더 분명히 들으려면, 새벽 안개가 낮게 깔리기 전에 그곳에 가야 했다.

도복을 여미는 손가락 끝이 약간 떨렸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새벽 공기 속에 스민 긴장 때문인지, 민준 자신도 분명하지 않았다. 직검(直劍)의 검집을 왼 허리에 고정하고, 천천히 방문을 밀어 열었다. 안채 마루는 고요했다. 기와 처마 끝에서 새벽이슬이 한 방울씩 마당 흙에 닿는 소리만이 낮고 규칙적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저 멀리 닭이 울기 직전의 그 짧은 적막이 부여가 본가의 뜰을 채우고 있었다. 어머니의 방 창호지는 완전히 어두웠다. 민서의 방에서는 아이의 고른 숨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민준은 발끝으로 마루를 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랑채 앞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창호지에 드리운 그림자가 있었다. 정좌(正坐)한 형태였다. 반듯하게 허리를 세우고 두 무릎 위에 손을 얹은 채, 잠든 것도 아닌 그 자세로. 아버지의 그림자였다.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그 정지 속에는 사랑채 문 너머까지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식이 어디를 향하는지, 이 밤의 어떤 기척을 따라가고 있는지를 알면서도 발걸음을 잡지 않는, 그 특유의 침묵이었다.

민준은 잠시 멈추었다. 눈이 창호지 위의 그림자에 머물렀다. 그 침묵이 무엇인지 17세의 기억은 완전히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이렇게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민준은 아직 묻지 못했고, 아버지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마루 끝 처마 아래로 새벽 한기가 흘러드는 동안, 아들의 발걸음이 사랑채를 벗어나 담장 쪽으로 이어지는 것을 아버지의 그림자는 아무런 반응 없이 지켜보았다.

부여가 담장을 나선 민준의 앞에는 이른 새벽 솔숲 오솔길이 아직 어둠과 안개를 반씩 가르며 뻗어 있었다. 발아래 흙이 새벽이슬을 머금어 조금 촉촉했다.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낮고 서늘했으며, 낙엽이 썩어가는 향과 솔 향이 뒤섞인 그 특유의 새벽 냄새가 민준의 코끝에 가득 찼다. 오솔길은 완만한 언덕을 돌아 내려가며 송산리 사당으로 이어졌다. 자주 걷던 길이었다. 13세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17세의 기억이 이 길 위에 다른 것을 얹어 놓고 있었다. 회귀 직전의 기억. 의식이 무너지던 그 순간, 눈동자 속으로 밀려들어 오던 청록의 빛. 그것이 이 오솔길 끝에 있었다.

솔가지가 가끔 바람에 쓸렸다. 그럴 때마다 민준의 눈이 자연스럽게 솔숲 안쪽으로 향했다. 어제 담장 너머에서 감지했던 기척은 지금 이 새벽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찰꾼이란 원래 느껴지지 않을 때가 더 위험한 법이었다. 17세의 기억이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민준은 발걸음의 속도를 바꾸지 않은 채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다.

안개가 더 짙어지는 곳에서 사당의 낡은 목조 기둥이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송산리 사당(松山里 祠堂)은 오래된 곳이었다. 기와는 여기저기 이끼가 올라와 있었고, 낡은 목재 기둥들은 세월의 무게를 머금어 어두운 다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문의 빗장은 걸려 있지 않았다. 부여가(扶餘家)와 이 사당 사이에는 오래된 인연이 있었다. 13세의 기억 속에서도 이곳에 드나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민준은 빗장을 옆으로 밀고 사당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식어버린 향(香)의 냄새가 먼저 몰려왔다. 오래된 목재와 찬 공기와 스러진 향연(香煙)이 한 겹으로 섞인 그 독특한 냄새. 사당 안은 창문 사이로 스미는 새벽 달빛만이 길을 내주고 있었고, 그 희미한 빛이 닿는 곳에서만 먼지 낀 바닥과 퇴락한 제단의 윤곽이 떠올랐다. 향로 안에는 재만 남아 있었다. 촛대의 촛농이 제단 가장자리로 굳어 흘러내린 것이 한동안 손이 닿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적막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었다. 사당 바깥 솔숲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은 오히려 이 안의 고요를 더 짙게 만드는 것이었다.

민준의 시선이 천천히 사당의 북쪽 벽으로 향했다. 청룡(靑龍) 벽화였다. 새벽빛 속에서도 그것은 분명하게 살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푸른 비늘의 결이 빛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은은하게 윤기를 품고 있었으며, 거대한 몸통이 구름을 헤치며 하늘로 솟구치는 형태로 그려진 그 청룡은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선명한 기운이 선 위에 살아 있었다. 눈동자가 특히 그러했다. 금빛을 띤 청록의 그 눈동자는 사당 안 어디서 바라보아도 보는 이를 향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묘한 것이었다. 벽화 하나가 이 오랜 적막을 혼자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이상하지 않았다.

민준은 그 눈동자 앞에서 멈추었다. 회귀 직전의 기억이 올라왔다. 사비성의 성문이 무너지던 그날. 17세의 몸에 남아 있던 상처의 무게. 의식이 허물어지던 순간, 눈동자 속으로 밀려들어 오던 그 청록의 빛. 그것이 이 눈동자였다는 것을 민준은 뼈로 알고 있었다. 추상적인 앎이 아니었다. 손바닥과 발바닥과 단전(丹田) 깊은 곳이 기억하고 있는, 신체의 언어로 새겨진 기억이었다. 벽화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그 기억과 현재가 한 겹으로 겹쳐지는 것이었다.

민준은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마루 바닥이 무릎에 닿았다. 새벽 한기가 도복 무릎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에 개의치 않고 민준은 벽화 앞에 단정하게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눈을 감았다. 새벽의 고요가 귀를 채웠다. 처마 끝에서 이슬 떨어지는 소리. 솔숲의 바람 소리. 멀리서 닭이 울기 시작하는 소리. 그리고 그 모든 소리 아래에 깔려 있는, 이 사당의 오래된 적막.

첫 번째 들숨이었다. 단전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감각이 왔다. 13세의 이 몸은 아직 내공(內功)의 기초조차 완전히 세우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어젯밤 발끝에서 처음으로 청룡의 기운이 응답했다는 사실이, 이 혈통 안에 이미 무언가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들숨을 천천히 이어갔다. 두 번째. 세 번째. 갈비뼈 안쪽이 서서히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네 번째 들숨에서 단전 깊은 곳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직 이 어린 몸이 감당하기 어려운 기운의 밀도였다. 그러나 민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섯 번째 들숨이 단전을 가득 채웠다. 갈비뼈 안쪽이 서늘하게 당겼다. 열세 살짜리 몸의 한계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알리는 그 느낌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민준은 날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래에서 위로. 발끝부터 무릎을 향해 무언가가 뻗어 나갔다.

사신호흡(四神呼吸) 1식(一式). 청룡등천(靑龍騰天). 어젯밤의 그것보다 확실히 선명했다. 발끝에서 시작된 청록빛 기운이 발목을 지나 정강이를 타고 무릎 아래까지 뻗어 나갔고, 그것이 이어지는 동안 발바닥의 용천혈(湧泉穴)에서 미세한 전류 같은 감각이 올라왔다. 어젯밤보다 두 배는 더 선명하고 두 배는 더 길었다. 그리고 기운이 무릎에 닿는 순간, 사당의 청룡 벽화가 반응했다. 벽화 속 청룡의 금빛 눈동자가 달빛 속에서 한순간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눈동자의 색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살아 있는 기운이 그림 위에서 공명(共鳴)하는 것 같은 감각이 민준의 온몸을 얇게 훑고 지나갔다. 피부 위의 솜털이 일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등줄기를 타고 무언가가 흘렀는데, 차갑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은,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온도의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오른손 손바닥에 무언가가 맺혔다. 무릎 위에 놓인 오른손의 정중앙이었다. 물고기의 비늘 같은 형태가 피부 위로 살짝 돋아오르는 감각. 너무 짧은 순간이어서 착각인가 싶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단 한 호흡 사이에 맺혔다가, 다음 호흡과 함께 흩어졌다. 민준은 눈을 뜨고 오른손을 뒤집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열세 살 소년의 손바닥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직 방금의 감각이 잔열처럼 남아 있었다. 비늘이 맺혔다가 사라진 그 자리에, 미세한 온기가 손바닥의 결을 따라 천천히 식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민준은 손바닥을 쥐었다가 폈다. 다시 한 번 쥐었다가 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손바닥 중앙의 그 온기는 분명했다. 그리고 벽화의 청룡 눈동자는 여전히 그를 향하고 있었다. 아까와 같은 눈빛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분명히 무언가가 바뀐 채로.

민준은 천천히 일어났다. 무릎에서 새벽 한기가 떨어져 나갔다. 허리를 펴고 청룡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사당 안의 적막이 그를 감쌌다. 어쩌면 이 눈동자는 오래전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부여가의 혈통이 다시 이 자리에 서는 날을. 그러한 예감이 드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청룡 벽화 앞에 마지막으로 한 번 깊이 고개를 숙이고, 민준은 사당을 나서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 순간 그는 알지 못했다. 사당 동쪽 담장 너머, 솔숲 안쪽 바위에 몸을 붙인 채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다는 사실을. 한편, 그 눈의 주인인 흑련회 정찰꾼은 자신의 손바닥이 젖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스물여덟의 나이에 흑련회 정찰대에 들어온 이후 7년을 그림자 속에서 살아온 자였다. 정면 충돌을 피하고, 들키지 않고, 보아야 할 것을 정확하게 보아 상부에 전하는 것. 그것이 그가 살아남은 방식이었다. 오늘 새벽, 부여가 소년이 새벽 어둠을 뚫고 혼자 집을 나서는 것을 보았을 때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따라가면서도 거리를 유지했다. 솔숲 안쪽 나무와 나무 사이를 조용히 옮겨가며, 소년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눈에 담았을 뿐이었다. 사당 동쪽 담장 바깥의 바위 뒤에 몸을 낮추었을 때, 검은 도복(道服)이 새벽 어둠과 하나가 되었다. 담장의 틈새로 사당 안이 부분적으로 보였다.

소년이 청룡 벽화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부터 그의 눈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새벽 기도라고 하기에는 앉는 방식이 달랐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눈을 감는 그 자세가. 7년간 무수한 무가(武家)와 무인(武人)을 정찰해왔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호흡(呼吸)이었다. 수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이었다. 소년이 날숨을 내뱉는 순간, 담장 틈새로 보이는 그 흰 도복의 발끝부터 무언가가 일어났다. 안개와 달빛이 섞인 새벽의 희미한 빛 속에서, 그러나 그의 눈에는 분명하게, 청록빛의 기운이 소년의 발끝부터 무릎 아래까지 일순간 선명하게 뻗어 나갔다가 사그라들었다. 새벽 안개의 빛 굴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뚜렷하고 너무 의도적인 형태였다. 흑련회 안에서 오랫동안 문서로만 전해지던 그것과 일치하는 형태였다.

정찰꾼의 등에 차가운 것이 흘렀다. 소년이 벽화 앞에 고개를 숙이고 사당 출구를 향해 등을 돌릴 때가 되어서야 정찰꾼은 담장 바위 뒤에서 천천히, 소리 없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년이 사당을 나서면 오솔길을 따라 부여가로 돌아갈 것이었다. 더 가까이에서 보아야 했다. 이 소년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를. 13세의 이 어린 몸에서 저런 기운이 나왔다는 것의 의미를.

새벽 오솔길은 사당을 벗어나면서 솔숲을 옆에 끼고 이어졌다. 민준은 사당의 빗장을 원래대로 걸고 나서 걸음을 내딛었다. 새벽안개가 아까보다 조금 더 짙어져 있었다. 솔숲 사이로 바람이 한 번 쓸고 지나갔고, 솔가지가 서로 닿으며 낮은 소리를 냈다. 사신호흡(四神呼吸)의 여운이 아직 몸 안에 남아 있었다. 발끝의 온기. 손바닥 중앙의 잔열. 청룡 벽화의 눈동자가 공명하던 순간의 그 감각이 피부 위에 얇게 씌워져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더 깊어지고 더 안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민준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담장 너머의 그림자가 확신을 가지고 돌아오기 전에 확보해야 할 시간이.

발걸음이 세 번 더 이어졌을 때였다. 민준의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오솔길 오른편 솔숲 안쪽에서 무언가가 달랐다. 솔가지를 스치는 바람의 결이 조금 전과 달랐다. 새벽 안개가 나무와 나무 사이에 고르게 깔려 있는 속에서, 어떤 지점에서만 안개의 밀도가 달랐다. 살아 있는 무게를 가진 무언가가 거기 있을 때 그렇게 된다는 것을, 17세의 기억이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다. 어제 담장 너머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가까웠다. 그리고 훨씬 조용했다.

민준은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발걸음을 유지했다. 속도를 바꾸어서는 안 됐다. 뛰어서는 더욱 안 됐다. 감지했다는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됐다. 17세의 기억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것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상대가 당신이 알아챘다는 것을 알면,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이었다. 민준은 걸으면서 솔숲의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무 사이에서 안개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방향이 있었다. 솔가지가 바람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흔들리는 지점이 있었다. 그것은 오솔길과 나란히 이어지고 있었다. 민준의 발걸음을 따라, 조심스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등 뒤에서 시선의 무게가 느껴졌다. 민준은 속으로 호흡을 한 번 고르게 고른 뒤 발걸음의 간격을 자연스럽게 조금 더 넓혔다. 빠르게 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거리를 좁히는 방식이었다. 솔숲의 기척이 같은 속도로 따라왔다. 거리를 좁히지도 벌리지도 않은 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관찰하고 있는 것이었다. 확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젯밤 담장 너머에서 사라졌던 그 그림자라는 것을 민준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늘 새벽 다시 나타났다는 것은, 어젯밤의 보고에서 무언가 더 확인이 필요한 것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확인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방금 전 사당 안에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생각하면, 민준은 짐작할 수 있었다.

발아래 낙엽 하나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솔숲에서, 오솔길보다 약간 더 안쪽에서. 민준의 단전 깊은 곳에서 방금 전 호흡에서 남은 기운이 미세하게 반응했다. 경계(警戒)의 감각이었다. 13세의 이 몸은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사신호흡 1식은 이제 겨우 두 번째였다. 손바닥에 비늘이 맺혔다 흩어지는 수준의 기운이었다. 그러나 도망을 선택해서도 안 됐다. 도망은 곧 약함의 증명이었고, 약함은 상대의 결정을 앞당기는 것이었다.

부여가 담장이 안개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끼 낀 흙담의 윗선이 새벽안개를 뚫고 보이기 시작했다. 오솔길의 끝이었다. 민준은 마지막 오솔길 굽이를 자연스럽게 돌며 담장 쪽으로 나아갔다. 솔숲의 기척이 담장 앞에서 멈추었다. 거기서 더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담장 너머는 부여가의 영역이었다. 정찰꾼이 그 선 앞에서 멈추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민준은 담장 문에 손을 얹으면서 딱 한 번, 자연스러운 걸음의 흐름 속에서 고개를 약간 틀었다. 보이지 않았다. 솔숲 안쪽 그림자 속에 완전히 녹아 있었다. 그러나 거기 있다는 것을, 민준은 알고 있었다. 담장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무거운 안도감과 더 무거운 긴장감이 동시에 어깨를 눌렀다. 부여가 마당에는 아직 새벽이 머물러 있었다. 우물 두레박이 미동도 없이 걸려 있었고, 느티나무 가지 위에서 참새 한 마리가 잠에서 깨어나는 참이었다. 어머니의 방 창호지에 이제 막 빛이 들기 시작했다. 사랑채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아버지는 새벽 내내 그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민준은 담장 문을 조용히 닫으면서 손바닥을 폈다. 중앙의 온기는 이제 거의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어디인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비늘이 맺혔다가 사라진 그 지점. 청룡 벽화가 공명하던 그 순간. 이것이 무엇인지를 이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날이 오면, 그때 알게 될 것이었다.

오솔길 쪽에서 기척이 사라지지 않았다. 담장 앞에서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민준은 눈을 들어 마당 끝 느티나무를 바라보았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사랑채 창호지 위의 그림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의 침묵과 솔숲의 기척이 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시에 그의 등을 눌렀다.

이번엔 여기서부터 내가 정한다. . - 솔숲 바위 뒤에서 정찰꾼은 소년이 담장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숨을 내뱉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흑련회 정찰대에서 7년을 보내면서 손바닥에 땀이 맺혀 본 적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던 것이었다.

새벽 안개 속에서 소년이 시전하던 그 청록빛이 아직 눈 안에 남아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다. 단 한 번의 날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했다. 발끝에서 무릎까지 뻗어 나가는 그 기운의 형태가, 흑련회 내부에서 오랫동안 문서로만 전해지던 그것과 일치했다. 부여가(扶餘家)가 보유한 비전(秘傳). 오래전부터 소문이 있었고, 정찰꾼은 그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이 마을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13세짜리 어린 소년의 몸에서 저런 기운이 나왔다는 것은. 소문 이상의 것이 부여가에 있다는 것을. 정찰꾼의 시선이 담장 너머 기와 지붕 위로 올라갔다. 새벽빛을 받아 검은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그것. 이 저택 안에 있는 것들이 단순히 오래된 가문의 무학(武學)이 아닐 가능성이. 소년의 눈빛이 또 생각났다. 열세 살의 눈에서 나오기에는 너무 고요하고 너무 또렷한 것이었다. 마치 오래 살아온 자의 눈처럼, 이미 많은 것을 보고 돌아온 자의 눈처럼. 오솔길에서 자신이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걸음의 속도 하나 바꾸지 않던 그 소년의 뒷모습이.

정찰꾼의 손이 허리춤의 서찰통(書札筒)을 조용히 쥐었다. 검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통이었다. 안에는 얇은 서찰지와 먹즙이 들어 있었다. 이것을 여는 순간, 정찰 임무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혼자서의 관찰이 끝나고, 상부의 판단이 개입하는 것이었다. 그는 7년 동안 이 통을 함부로 열지 않았다. 보고해야 할 것과 보고하지 않아도 될 것을 스스로 판단했고, 그 판단이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솔숲 바위 뒤 그림자 속에서, 정찰꾼의 손이 서찰통의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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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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