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온몸을 감쌌지만, 어제 겪었던 대학 생활의 첫 충격은 여전히 잔상처럼 머릿속에 떠다녔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어색하게 먹었던 점심 식사,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던 복잡한 캠퍼스 지도, 그리고 끊임없이 귓가에 맴돌던 민준의 활기찬 목소리와 서연의 똑 부러지는 말들. 모든 것이 새로웠고, 그만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심장을 옥죄어 왔다. 이대로라면 첫 발부터 삐끗할 것만 같았다. 창문 너머로는 새벽의 희뿌연 하늘이 겨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시간, 방 안은 마치 폭풍 전야처럼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하지만 낡은 카메라 액정 속 행운 쿠키 사진을 다시 보니, 어제 품었던 그 미약한 기대감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나는 듯했다. 어쩌면, 정말로 이곳에서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그 작은 희망 한 조각이 하준의 불안한 마음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새벽 일찍 잠에서 깼다. 침대 곁에 놓인 낡은 알람 시계는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대학 생활의 두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관문, 수강신청의 날이었다. 이불을 걷어내자 싸늘한 공기가 맨발을 감쌌다. 으스스한 한기가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재빨리 책상으로 향해 노트북을 켰다. 쿨링팬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텅 빈 방 안을 채웠다. 어둠 속에 홀로 앉아 노트북 화면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혼자라는 느낌이 더 강해졌다.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아직 시간은 한참 남았지만, 벌써부터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어제 과연 내가 '괜찮아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건, 준비가 부족해서가 아니었을까? 소심함 탓만은 아니었을까? 오늘은 달라야 한다. 나 스스로 뭔가를 해내야 했다. 어젯밤, 밤새워 미리 작성해둔 수강신청 계획표를 다시 한번 펼쳤다. 엑셀 파일에는 시간표 칸칸이 원하는 과목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필수 전공, 교양,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예비 과목까지. 서연이 평소에 강조했던 '완벽한 계획'에 최대한 가깝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문제없을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작게 주먹을 쥐었다. 노트북 화면의 푸른빛이 하준의 긴장된 얼굴을 비췄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그는 모니터 속 시계가 9시를 가리키기를 기다렸다. 작은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방 안은 고요했다. 창밖에서는 아직 새들의 지저귐조차 들리지 않는 새벽이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8시 50분, 8시 55분.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마치 심장 박동처럼 느껴졌다. 그의 손은 이미 마우스 위에 올려져 있었고, 손가락은 신청 버튼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히 마우스 스크롤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불필요한 긴장을 풀려 애썼다. 모니터 속 시간은 마치 멈춘 듯 느리게 지나갔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하아, 심호흡 한 번 하고."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전 9시 정각. 수강신청 시작 시간이었다. 심장이 쿵, 쿵, 쿵, 가슴을 때렸다. 마우스 커서는 이미 신청 버튼 위에 대기 중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아.’ ‘이번엔 내가 정한다.’ 속으로 되뇌었다. 어제처럼 어설픈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9시를 알리는 시계가 바뀌는 순간, 전국 각지의 수많은 대학생이 동시에 접속한 탓에 학교 서버는 거대한 파도를 맞은 듯 휘청거렸다. 화면은 움직이지 않았고, 마우스 커서는 한참 동안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로딩 아이콘은 마치 비웃듯이 빙글거렸다. ‘접속 중입니다…’,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오류 메시지들이 하준의 작은 자취방을 가득 채웠다.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그의 얼굴을 달궜다. 귓가에는 서버 접속 시도음만이 맴돌았고, 삑삑거리는 기계음은 그의 초조함을 더욱 자극했다.
“젠장, 벌써 이렇다고?” 낮게 탄식했다. 겨우 몇 초 만에 이렇게 될 줄이야.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손가락은 이미 제멋대로 움직이며 새로고침 버튼을 광적으로 눌러댔다. '제발, 제발!' 속으로 수없이 외쳤다. 눈은 모니터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접속에 성공했을 때, 이미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하준이 첫 번째로 신청하려 했던 필수 전공 과목은 이미 ‘마감’이라는 붉은 글자로 뒤덮여 있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감’. 그 두 글자가 마치 거대한 벽처럼 앞을 가로막는 기분이었다. 겨우 잡은 서버는 또다시 느려졌고, 다른 과목들을 확인하기도 전에 화면은 다시 멈춰버렸다. 손은 마우스를 꽉 쥐고 있었고, 손목에서는 삐걱거리는 작은 소리가 나는 듯했다. 입안은 바싹 말라붙었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이게 내 대학 생활의 시작이라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제 점심때 느꼈던 어색함보다 훨씬 더 깊은 좌절감이 몰려왔다. 애써 계획하고 준비했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겨우 접속이 되면, 또 다른 과목들이 ‘마감’ 딱지를 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나를 놀리는 것만 같았다.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마우스를 클릭했지만,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어... 저, 저는 괜찮아요. 다른 분들이 먼저 하시는 게...’ 지난날의 소심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이 중요한 순간에도 우물쭈물하는 자신을 바꾸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대로라면 첫 학기부터 엉망이 될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대로 끝인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그를 덮쳤다. 모니터 속 마감된 과목들이 마치 그의 실패를 조롱하는 듯 보였다.
그때였다. 딩동, 딩동. 현관 벨소리가 자취방의 정적을 깨고 울렸다. 누구지? 이 아침에. 하준은 당황해서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 다시 딩동, 딩동. 이번엔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누가 이렇게 급하게 찾아오는 걸까? 혹시 옆방 사람인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쿵 내려앉았다.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야, 강하준! 너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문 안 열어? 죽었냐?” 익숙한 목소리. 민준이었다. 하준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갔다. 어색한 표정을 감출 새도 없이, 문을 열자 민준이 활짝 웃으며 서 있었다. 그의 뒤에는 서연도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서연은 이미 노트북을 든 채로 하준의 방 안을 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부터 웬일이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직 세수도 안 했는데.
“하준아, 너 수강신청 안 해? 설마 아직도 헤매고 있는 건 아니겠지?” 민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금세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로 바뀌었다. 그는 하준의 어깨를 툭 치며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꿉꿉했던 방 안으로 민준 특유의 활기찬 에너지가 밀려들어왔다. “야, 강하준, 너 또 쭈뼛거리지? 빨리 말해봐! 뭐 때문에 그래?” 민준의 밝은 에너지가 작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의 목소리에는 언제나처럼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서연도 민준의 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서며 하준의 노트북 화면을 흘긋 봤다. 그녀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하준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노트북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을 뿐이었다. 모니터 속 ‘마감’ 글자들이 마치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것 같아 민망했다. 민준과 서연이 하준의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봤다. 화면에는 여전히 ‘마감’ 글자와 함께 에러 메시지가 가득했다. 민준은 고개를 젓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대박, 진심 쩔어. 이 정도면 거의 전쟁터인데? 걍 새로고침만 누르지 말고, 나한테 말해봐. 무슨 과목이 필요해?” 민준의 목소리에는 장난스러움 속에서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의 표정은 심각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밝았다.
서연은 민준과 달리 차분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노트북 화면 속 복잡한 시간표와 과목 목록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모니터 화면 위를 착, 착, 착 훑어 내려갔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매만졌다. “강하준, 너는 네 의견을 좀 더 확실하게 말할 필요가 있어. 일단 어떤 과목이 마감되었는지 정확히 말해줘. 그리고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는지도.”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그 안에는 도움을 주려는 의지가 명확히 담겨 있었다. 하준은 그녀의 단호함 속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문제가, 어쩌면 해결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하준은 겨우 입을 열었다. “어… 저, 저는… 핵심 교양이랑… 전공 필수가 몇 개… 다 마감된 것 같아요. 계획했던 대로 하나도 못 넣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어들어가는 듯했지만, 친구들의 존재만으로도 절망감이 조금은 가시는 기분이었다. 혼자 끙끙 앓던 문제가 이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친구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일단 민준이 네 노트북 좀 빌려줄 수 있어? 서버가 불안정해서 여러 대에서 동시에 접속하는 게 더 유리할 것 같아.” 서연이 민준에게 말했다. 민준은 흔쾌히 자신의 노트북을 건넸다. 민준의 노트북은 하준의 것보다 훨씬 최신형이었다. 서연은 하준의 계획표를 보며 빠르게 빈자리를 찾아 나섰다. 그녀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정신없이 움직였다. 마치 마스터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같았다. 타닥, 타닥, 타닥. 키보드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방 안을 울렸다. 하준은 서연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그녀의 움직임을 넋 놓고 바라봤다. 그의 눈은 서연의 손가락 움직임을 쫓아가기에 바빴다.
“논리적으로 지금 비어있는 과목들을 효율적으로 선택해야 해. 이건 나중에 바꾸더라도 일단 채워 넣는 게 중요해. 그리고 너, 교양은 조금 여유로운 걸로 돌려도 돼. 전공 필수가 우선이니까.” 서연은 짧고 명확하게 지시했다. 그녀는 몇 초 만에 하준이 놓쳤던 새로운 정보들을 캐치해냈다. 비어있는 분반, 다른 교양 과목, 그리고 수강 정원이 아직 남은 전공 선택 과목들. 하준은 그녀의 옆에 서서 그저 멍하니 화면만 바라봤다. 자신이 몇 시간 동안 고군분투했던 일들이 그녀의 손에서 순식간에 정리되어 가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였다. 마치 다른 세상의 일 같았다. 그의 입에서는 감탄사조차 나오지 않았다.
민준은 그 옆에서 하준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봤지, 하준아? 서연이 쟤는 저런 거엔 진짜 짱이라고! 걍 믿고 맡겨두면 돼.” 민준의 말에 하준은 겨우 미소 지었다. 그의 옆에서 민준은 끊임없이 농담을 던지며 하준의 긴장을 풀어주려 애썼다. “야, 근데 너 어젯밤에 라면 먹었냐? 얼굴이 퉁퉁 부었네, 진심!” 민준의 장난스러운 말에 하준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방 안의 무겁던 공기가 한층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됐어.” 서연의 짧은 한마디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하준은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노트북 화면에는 모든 과목이 깔끔하게 수강신청 완료로 표시되어 있었다. 비록 완벽하게 계획했던 시간표는 아니었지만, 필수 전공과 핵심 교양은 모두 채워져 있었다. 하준은 감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목이 메었다. “서연아, 정말… 정말 고마워. 민준이 너도…” 그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것 같았다. 그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서연은 무심한 듯 답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미미한 뿌듯함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살짝 미소 지었다. “다음에 더 좋은 과목 나오면 그때 다시 바꾸면 돼. 일단 이렇게라도 해두는 게 중요했어.”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하준은 그 속에 담긴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은 하준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민준은 하준의 등을 찰싹 때리며 웃었다. “야, 이제 살 것 같지? 진심 쩔어. 그럼 우리 셋이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까? 어차피 수강신청도 끝났겠다.” 민준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듯했다. “배고프다, 배고파.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맛있는 거 먹자!” 민준의 제안에 하준은 활짝 웃었다.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의 절망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가슴속에 안도감과 함께 친구들에 대한 따뜻한 감정이 차올랐다. 혼자서는 절대 해낼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들의 도움 덕분에, 첫 관문을 무사히 넘긴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대학 생활이 그렇게 절망적이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왠지 모르게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셋은 자취방을 나와 캠퍼스를 거닐었다. 수강신청의 전쟁이 끝난 후라 그런지, 캠퍼스 공기는 한결 여유롭게 느껴졌다.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이며 머리카락을 스쳤다.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렸다. 저 멀리서는 새들의 지저귐과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꽃 향기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지럽혔다. 민준은 계속해서 수강신청 에피소드를 과장해서 이야기했고, 서연은 그 옆에서 차분하게 민준의 허풍을 정정해주었다. 하준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웃었다. 어제처럼 어색한 침묵은 없었다. 대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대화들이 오고 갔다. 함께 걷는 발걸음은 가볍고 활기찼다.
"근데 동아리 같은 건 찾아봤어?" 민준이 불쑥 물었다. 그는 길을 걷다 말고 갑자기 하준에게 몸을 돌렸다. "야, 우리 셋이 같이 재밌는 거 하나 할까? 걍 아무거나. 동아리라도 가입해서 대학 생활의 낭만을 즐겨야지!" 그의 눈은 장난기로 가득했다.
하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원래도 동아리 활동 같은 건 잘 안 해봐서…" 그는 말끝을 흐렸다. 괜히 나섰다가 실수하면 어쩌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아직은 낯설었다.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에이, 그러면 안 되지! 대학 생활의 꽃은 동아리라고! 특히 우리 과는 동아리가 진짜 많다니까?" 민준이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캠퍼스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지나가던 다른 학생들이 그들을 흘긋 쳐다봤다. 하준은 괜히 민망해서 어깨를 움츠렸다. 민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건 좀 과장된 표현이고." 서연이 민준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동아리 활동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건 맞아. 너도 하나쯤 해보는 게 좋을 거야, 강하준. 네가 평소에 관심 있었던 분야를 찾아보는 게 어때? 네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그녀의 조언은 늘 합리적이었다.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대화는 낡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은 다른 현대적인 건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외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이끼가 조금씩 피어 있었고, 벽돌은 군데군데 닳아 있었다. 건물 외벽에는 '중앙 동아리 연합회'라는 낡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녹슨 글씨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반쯤 열려 있었다. 안쪽은 어둡고 희미했다. 왠지 모를 호기심에 이끌려 셋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먼지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먼지 냄새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복도는 길고 어두웠고, 양옆으로는 크고 작은 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바닥은 삐걱거렸고, 천장에서는 희미한 형광등만이 깜빡였다. 형광등에서는 '지지직' 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각 방 문에는 낡은 손글씨로 동아리 이름이 적혀 있었다. '미술반', '사진 동아리', '문학회', '영화 감상반'. 글씨들은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 색이 바래 있었고, 어떤 이름은 지워진 채로 그 위에 새로운 이름이 덧씌워져 있었다. 마치 이곳의 역사를 보여주는 듯했다.
"와, 여기 진짜 오래됐다. 진심 박물관 아니냐? 귀신 나올 것 같아." 민준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는 벽에 붙은 낡은 포스터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포스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먼지가 폴폴 날렸다. 민준은 기침을 콜록거렸다.
서연은 한 방 문 앞에 멈춰 섰다. '통기타 동아리'라고 적힌 낡은 문이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호기심에 안을 들여다보니, 방 한가운데에 먼지 쌓인 통기타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기타 케이스는 낡았고, 가죽은 헤져 있었다. 줄은 녹슬어 있었고, 나무 본체에는 긁힌 자국들이 선명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려온 듯한 모습이었다. 기타 옆에는 낡은 악보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악보들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기타 케이스 위에는 잊힌 듯 낡은 피크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준은 그 기타를 보는 순간, 자신의 낡은 필름 카메라가 떠올랐다. 쿠키 사진을 찍던 그 카메라. 고장 나기 전까지 아버지가 쓰던, 이제는 자신에게 물려진 카메라. 예술적인 무언가를 갈망하면서도, 늘 소심함 때문에 주저했던 자신의 모습과 겹쳐지는 듯했다. 낡은 기타는 그에게 잊고 있던, 어딘가 깊숙이 숨겨져 있던 예술적 감각을 건드리는 듯했다. '나도 저 기타처럼, 언젠가는 빛을 발할 수 있을까? 녹슬고 낡았지만, 다시 연주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여기… 왠지 멋있다." 하준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방 안의 정적에 흡수되는 듯했다. 조용하고 깊은 울림이 있었다. 민준은 기타를 집어 들어 몇 번 퉁겨봤다. '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의 얼굴에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번졌다. "야, 이거 소리 죽이는데? 진심 감성 쩔어. 나도 기타 배워볼까? 걍 바로 스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민준은 기타를 들고 엉성하게 자세를 취하며 장난을 쳤다. 그는 기타를 어설프게 연주하는 시늉을 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서연은 그런 민준을 보며 피식 웃었다.
서연은 기타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기타의 상태와 주변 환경을 빠르게 스캔했다. "이렇게 관리가 안 되어 있다는 건, 동아리 활동이 활발하지 않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다시 살려볼 가치는 있을 것 같아. 잘만 하면.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야." 그녀는 기타 줄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겨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셋은 동아리방을 나와 복도를 더 걸었다. 복도 끝에는 '캠퍼스 라디오 방송국'이라고 적힌 또 다른 낡은 문이 있었다.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문 옆에는 작은 나무 게시판이 붙어 있었는데, 수많은 쪽지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에는 학생들이 익명으로 남긴 메시지들이 가득했다. 노래 신청, 짧은 사연, 짝사랑 고백, 그리고 가끔은 알 수 없는 푸념들. 어떤 쪽지는 가장자리가 해져 있었고, 어떤 쪽지는 겹겹이 붙어 두께감을 더했다. 게시판은 마치 학생들의 작은 마음이 모인 거대한 조각보 같았다.
'오늘도 과제 때문에 밤샘… 살려줘… 커피 수혈 시급.'
'OO학과 김XX 선배님, 제 마음을 받아주세요! 벚꽃 보러 갈래요?'
'어색함 속에 피어나는 작은 우정, 응원합니다. 파이팅!'
'새내기 여러분, 파이팅! 곧 끝이 보일 거예요! 버티면 돼!'
'라면 먹고 갈 사람? 시험 기간엔 역시 라면이지! 컵라면 최고.'
'수강신청 망한 사람, 나밖에 없냐…? 눈물 젖은 빵.'
'봄은 오는데 내 사랑은 언제 오냐…'
하준은 메시지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그 속에는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고, 때로는 유쾌하고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도 있었다. '어색함 속에 피어나는 우정'이라는 메시지를 보니, 문득 민준과 서연과 함께 보낸 오늘 하루가 떠올랐다. 어제의 어색함은 온데간데없고, 묘한 유대감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듯했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거 봐라, 하준아! 네 이야기가 여기 다 있네!" 민준이 하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어색함 속에 피어나는 작은 우정! ㅋㅋㅋㅋ 진심 우리 얘기 아니냐? 야, 우리가 이 게시판의 주인공들이네!" 민준은 과장된 몸짓으로 게시판을 가리켰다. 그의 눈은 반짝였다.
서연도 메시지들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그녀는 한 쪽지를 떼어내 읽어보더니 다시 제자리에 붙였다. "학생들의 솔직한 감정들이 담겨 있네. 이런 소통 창구가 있다는 건 긍정적이야. 익명성이 보장되니까 더 솔직할 수 있는 거겠지. 이런 곳에서 사람들이 위로를 얻기도 하겠네." 그녀는 왠지 모르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하준은 게시판에 붙은 쪽지들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낡은 통기타에서 느꼈던 막연한 예술적 동경, 그리고 이 게시판에서 발견한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감. 어쩌면 대학 생활은 단순히 학점을 따고 졸업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자신은 분명 변화할 수 있을 것이었다. 소심했던 자신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 잊고 있던 꿈을 찾아 나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 그의 가슴속에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불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차가웠던 아침 공기는 어느새 따뜻한 설렘으로 바뀌어 있었다.
캠퍼스 라디오 게시판의 메시지들은 마치 앞으로 펼쳐질 하준의 대학 생활에 대한 예고편 같았다. 새로운 호기심과 함께, 그 속에서 피어날 미지의 우정에 대한 미약한 기대를 품게 했다. 어쩌면 이 낡은 건물 안에서, 그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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